온라인은 늘 시끌시끌하다. 거침없이 온갖 말들이 생성되고, 증발 해 버린다. 오프라인은 어떤가?
일상 속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수많은 이유들이 뒤죽박죽 뒤엉켜있다.
일상 속 사람들의 삶은 지나치게 바쁘고, 잠시 고개들어 하늘 한 점 볼 여유없이 달려가도록 짜여져 있는데 어찌 말들이 대화가 될 수 있을까? 일상 속 말들은 던져지는 명령어고, 지시어고, 방백이고 독백이고, 거친 아우성이 되고 만다. 이런 때 일수록 얼굴 마주하고 ‘대화’ ‘토론’을 해야하는 건 아닐까?
극장이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빠르게 생성되고, 거침없이 소비되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말들을 묶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 다른 생각을 차분히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나누고, 공감하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의견엔 손들어 이견을 두려움없이 말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공연공간을 디자인하고 싶은 게 나의 꿈이다.
생각해 볼 주제들이 넘쳐나는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오가는 말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생각들을 만나고 싶을 때 난, 극장에 간다.
파리에는 수많은 극장들이 있고, 그 중 어디선가는 다양한 형식의 ‘아고라 (Agora)’를 제안한다.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회의 장소이자, 도시의 운동, 예술, 정치적 삶의 중심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떼아뜨르 콜린 (La Colline – théâtre national : 프랑스 6대 국립극장들 중 하나), 소극장에서 청년 아고라(Agora Jeunesse) 가 열렸다.
청년 아고라는 18-27세 콜린극장의 청년 리포터 21인이 청년과 관련된 주제들을 선택, 관련있는 사람들, 서적들, 관계기관들, 증언들 등을 바탕으로 구성한 내용들로 기획한 포럼연극이다. 여기에 포럼연극 극단인 La Releve bariolee의 13인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 공동작업을 한 프로젝트이다. 이번이 5회째라 하니 5년간 지속된 프로젝트인 셈이다.
올해 청년 아고라의 슬로건은 ‘Echange le monde, Prete-moi tes yeux’ (세상을 나누자, 네 눈을 나에게 빌려줘) 였다.
오후 2시, 열린 극장문을 통해 들어 선 공간엔 여러 줄의 원형으로 배치 된 의자들이었다. 들어서는 사람들은 제각기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 착석한다. 남녀노소, 그야말로 다양한 세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청년 아고라에.
150여석은 족히 되보이던 좌석들이 차분히 채워지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이게 바로 1960년대 이전부터 구축하고 성장시킨 공공재로 문화정책의 성과구나, 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2025년 경제위기, 불황을 이유로 문화예산 삭감정책을 거침없이 행하는 마크롱 정부에 맞서, #DeboutPourLaCulture (문화를 위해 싸우자) 해시태그 저항운동의 선봉에 중.고생들이 앞장서는 것만 봐도 프랑스 문화행정과 정책이 60년간 해 온 방향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빵이 신체건강을 위한 필수품이듯, 문화는 개인및 공동체의 정신건강을 위한 필수품이라는 인식을 만드는 방향 말이다.
어느새 의자들은 저마다 주인들을 맞이했고, 음악과 함께 아고라가 시작되었다.
4개의 주제로 나눠, 각 주제마다 1시간 20분씩 배치되었다. 각 주제마다 청년 리포터들이 취재에서 만난 내용들을 전달하고고, 서책들에서 발췌한 내용을 낭독, 마지막은 두어개의 질문들로 참여자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참여자는 주제와 관련해 개인적 경험을 나누고, 어떤 참여자는 궁금한 점을 질문하고, 다른 이는 자신의 기억 속 어디선가 꺼내 온 함께 나눌 문장을 읊는다. 누군가는 발췌 중 놓쳤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첨언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일터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공유한다. 주최측의 요약 정리도 없고, 토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분위기 자체가 참 멋스러웠다. 자발적 참여와 발언들은 제각각 울림이 되어 공간 속에, 참여자들 사이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첫 주제는 말과 예술의 파워에 대한 것이었는데, 트럼프의 재등장 및 파쇼세력들의 확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혐오 발언들과 말의 왜곡, 어떤 말이 가진 가치폄하및 왜곡등에 대한 우려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란 가치의 심각한 왜곡. 표현의 자유란 미명아래 폭력, 혐오 발언들이 난무해도 된다는 식의 문화가 허용되는 사례… 정의와 공정이란 말들의 주관적 해석으로 본연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사례들…
이차대전 중에 태어나셨다는 백발 여인의 말이 한편으로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 한층 더 무거움으로 전달되었다.
“난 여러분들이 지금 겪고있는 이 혼란들을 이미 겪으며 살아 온 사람입니다. 젊고 늙음은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모습은 늙었어도 정신이 젊은 사람들이 있고, 몸은 젊으나 정신이 이미 늙은 사람들이 있지요… 청년 아고라를 통해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는 너무나 중요하니까요.”
첫 주제는 지금을 살아가는 누구나가 공감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더 많은 울림이 있었다.
4개의 주제 모두를 여기에 남기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경제, 문화, 민주주의 고속성장의 아이콘이었던 한국이 지독한 성장통을 지나가고 있는 지금, 우린 더욱 만나고 이야기하고 나눠야 할 사명감을 부여받은 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네가지 주제들
La puissance des mots et de l’art.
Espace de rencontre, outil de révolte.
Comment la parole et la poésie peuvent-elles demeurer des outils de résistance ?
Au cœur d’un bruit constant, saturé d’informations, il devient difficile de s’entendre. Or la parole est au cœur de la démocratie. Face à l’émergence de tyrans qui nient la réalité, bafouent la vérité, détournent des droits fondamentaux pour légitimer leur pouvoir et en abuser, quels moyens a-t-on pour se révolter, se rencontrer et entendre que nous sommes tous ébranlés ?
La parole avec sa valeur retrouvée, tout comme l’art et la poésie, demeurent des refuges où l’humanité de chacun peut s’exprimer et se partager.
Vous pouvez m’abattre de vos paroles,
Me découper avec vos yeux,
Me tuer de toute votre haine,
Mais comme l’air, je m’élève encoreMaya Angelou, “Et pourtant je m’élève” in And Still i Rise : A book of Poems, 1978
말과 예술의 힘.
예술은 만남의 공간, 반혁의 도구
어떻게 말과 시가 저항의 도구로 남을 수 있을까요?
끊임없는 소음과 정보로 가득 찬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말은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진실을 무시하며, 권력을 정당화하고 남용하기 위해 기본적 권리를 왜곡하는 폭군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우리가 저항하고, 만나고, 우리 모두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
예술과 시가 그러하듯 본래의 가치를 되찾은 말은 각자의 인간성이 표현되고 공유될 수 있는 피난처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말로 나를 쓰러뜨릴 수 있고,
눈빛으로 나를 베어낼 수 있으며,
당신의 모든 증오로 나를 죽일 수 있어도,
공기처럼, 나는 다시 일어납니다”Maya Angelou, “Et pourtant je m’élève” in And Still i Rise : A book of Poems, 1978
Les mille visages du deuil. De l’intime au collectif.
Peut-on apprendre à vivre avec la perte ? Que nous disent nos deuils sur notre époque, nos attachements et nos solidarités ?
Ce débat explore les différentes formes que revêt le deuil. S’il évoque d’abord la perte d’un être cher suite à un décès, il s’étend bien au-delà : la fin d’une amitié, d’un amour, un déracinement ou encore ce qu’on appelle le “deuil blanc” – autant de séparations doubloureuses, souvent invisibles ou peu reconnues. A côté de ces expériences intimes, il existe aussi des deuils collectifs, liés à des événements tragiques ou à des violences systémiques. Les deuils peuvent toujours se lire à deux niveaux, individuellement et collectivement. Qu’en est-il cependant des deuils empêchés ? Des situations où la possibilité même du deuil est remise en question ?
Où vas-tu donc ainsi, grand troupeau des humains ?
Depuis quels siècles longs tu souffres et tu pleures !
Tu crois toujours voir poindre, ô lamentables leurres !
Après les jours de deuil, de meilleurs lendemainsLéon Pamphile Le May, Les Épis, 1914
애도의 천 가지 얼굴. 개인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상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 시대, 우리의 애착과 연대에 대한 우리의 애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토론은 애도가 취하는 다양한 형태를 탐구한다. 애도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황을 떠올리지만, 그 범위는 훨씬 더 넓다: 우정의 끝, 사랑의 끝, 뿌리 뽑힘, 또는 “백색 애도”라고 불리는 것 – 이 모든 고통스러운 이별은 종종 보이지 않거나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 외에도, 비극적인 사건이나 체계적인 폭력과 관련된 집단적 애도도 존재한다. 애도는 항상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두 가지 수준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방해받은 애도는 어떨까? 애도의 가능성 자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들의 거대한 무리여?
얼마나 오랜 세기 동안 너는 고통받고 울어왔던가!
너는 항상 기대한다, 오 비통한 환상이여!
애도의 날들 이후에, 더 나은 내일을.Léon Pamphile Le May, Les Épis, 1914
Citoyens à part entière, citoyens entièrement à part.
Le traitement des Outre-mers.
Quelle place réelle pour les Outre-mers dans la République ?
Comment dépasser les silences, les inégalités, les blessures de l’histoire coloniale ?
Trop souvent invisibilisés dans les médias, ignorés dans les politiques publiques, les territoires ultramarins, vestiges de l’empire colonial français, occupent une place ambivalente dans la conscience nationale. Ce débat propose d’écouter les voix des jeunes originaires de ces territoires et de réfléchir ensemble à la reconnaissance, à la réparation, et à une vraie égalité des droits et des représentations.
Pour nous, le choix est fait.
Nous sommes de ceux qui refusent d’oublier.
Nous sommes de ceux qui refusent l’amnésie
même comme méthode.Aimé Césaire, “Discours sur le colonialisme”, 1950
온전한 시민이자, 완전 별개의 시민.
해외 프랑스 에 대한 처우.
공화국 내에서 해외 프랑스의 실질적인 위치는 무엇인가?
식민지 역사의 침묵, 불평등,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공공 정책에서 무시되는 해외 영토들, 프랑스 식민 제국의 흔적들은 국가 의식 속에서 양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토론은 이 영토 출신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인정, 배상, 그리고 권리와 대표성의 진정한 평등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제안한다.
우리에게, 선택은 주어졌다.
우리는 잊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기억상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수단으로도.Aimé Césaire, “Discours sur le colonialisme”, 1950
Le droit à la beauté. Inégalités du sensible et domination esthétique des territoires.
Comment les inégalités sociales, territoriales ou culturelles conditionnent-elles notre rapport au sensible, à l’esthétique et à la possibilité même de s’émouvoir ou de rêver ?
Il y a des lieux que l’on regarde, que l’on protège, que l’on restaure. Et d’autres que l’on traverse sans voir, ou qu’on détruit sans mémoire. Entre les quartiers riches et les cités reléguées, les villages bombardés et les centres historiques rénovés, ce débat propose de questionner cette cartographie inégale du sensible. Comment renverser ces logiques ?
Comment rêver en couleur quand l’futur n’annonce que l’orage
Le bonheur que l’on bricole disparaît dans la grisaille
Que nos espoirs s’isolent de la folie qui les cisaille.Kery James, “Vivre ou mourir ensemble”, 2016
아름다움에 대한 권리. 감성의 불평등과 지역의 미학적 지배.
사회적, 지역적 또는 문화적 불평등이 우리의 감성, 미학, 그리고 감동을 받거나 꿈꿀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가 바라보고, 보호하고, 복원하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지나치거나, 기억 없이 파괴하는 장소들도 있습니다. 부유한 지역과 소외된 도시, 폭격당한 마을과 재단장한 역사 지구 사이에서, 이 토론은 감각의 불균등한 지도화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논리를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까요?
미래가 폭풍만을 예고할 때 어떻게 색깔로 꿈꿀 수 있을까
우리가 손수 만든 행복은 회색빛 속에 사라진다
우리의 희망이 그것을 찢는 광기로부터 고립되도록.Kery James, “Vivre ou mourir ensembl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