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나는 18년 다니던 직장을 잃었다.
프랑스에 온 이유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본래의 자리, 연극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십여 년 동안 이어진 삶의 루틴이 타의에 의해 강제로 끊어질 때 어떤 파동이 일어나는지는, 막상 그 일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해고 이후 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지원서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고, 침묵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매일같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웠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연 작업을, 정작 직장을 잃고 나서는 떠올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다시 임금노동자로서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그것이 내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직원 1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웹 에이전시에서 18년을 일한 뒤 경제적 이유로 해고된 50대 노동자에게 구인 시장은 좀처럼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그 무렵, 세상은 AI가 만들어내는 변화를 연일 쏟아내고 있었다. 감원과 채용 축소, 사라지는 직업들, 새롭게 등장하는 자동화 도구들. 노동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차치하고, 내가 분명히 느낀 것은 하나였다. 내가 발 딛고 있던 땅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비로소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유정아, 넌 왜 프랑스에 왔니?
넌 무엇을 하고 싶니?
남은 시간 동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니?
그제서야 알았다,
나는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선택을 실제로 해볼 수 있는 기회.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동안 늘 접어 두었던 플랜 B를 펼쳐볼 기회.
그 플랜 B는 ‘연극창작자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25년 전, 내가 프랑스에 온 이유, 연극연출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당시 언어가 서툰 아시아 출신 연출 지망생에게 프랑스 공연계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언어도, 문화도, 시스템도 모두 높은 장벽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우선 살아남는 법을 선택했다.
웹을 배우고, 디자인을 배우고, 디지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도 공연계와의 인연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 디퓨전 담당으로, 현지 프로듀서로, 아티스트 매니저로. 어떤 역할이든 공연과 연결될 수 있다면 계속 그 곁에 머물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단순한 우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연출자이자 독립 프로덕션 Actanywhere의 운영자로 본격 작업을 준비하는 지금, 그 우회는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AI와 함께 작업하며, 한 사람이 공연 제작의 기획 단계부터 프로덕션 단계까지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25년 동안 문화예술과 디지털 두 세계에서 쌓은 경험과 훈련, 지식. 그리고 상상하고 계획하고 설계하는 것을 꽤 즐기는 나의 성향. 여기에 급속도로 발전해가는 AI 기술이 협력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리라.
AI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의 가치를 낮추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자본이 없어, 인력이 없어 뭔가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너무 많은 프로젝트가 시작도 하기 전에 사라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나는 AI가 그 첫 번째 문턱을 넘게 해줄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다.
나는 이미 AI와 함께 구체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성공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록하려 한다.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이 시도의 기록이 될 것이다. 진전과 실패, 막다른 길과 발견들.
이는 규칙이 바뀌어 가는 시대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 갈 방법’을 찾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가진 것이라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뿐이었던 사람들을 위한 작은 항해일지가 될지도 모른다.
